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카야마 우콘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수만석의 영지를 포기하고 신앙을 택한 인물. 최종적으로 성공한 무장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성공한 신앙인이 된 셈이다. 일본 [[가톨릭]]에서는 그를 [[성인(기독교)|성인]]으로 시성하도록 신청하기도 했다. 평등사상을 가져서 솔선하여 천민들에 대한 차별을 반대했다고 한다. 영민들에게 가톨릭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나, 한편으로 사원을 훼손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. 다인으로서도 유명했으며, [[센노 리큐]](千利休)의 제자로 오다 우라쿠사이(織田有樂齋) 등과 친분을 쌓았다. 우라쿠사이는 그의 다풍에 대해 ‘다 좋은데 결벽증이 있는 듯하다’고 평했다.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전쟁포로와의 인연도 있다. [[승려]] 출신으로 일본에 전쟁노예로 끌려간 카이요라고 하는 사람은 사제들과의 교류로 감명을 받아 가톨릭으로 신앙을 바꾸고 [[예수회]]에 입회하고자 하였다. 하지만 입회 허가가 되지 않자 카이요는 키리시탄 다이묘인 다카야마 우콘의 부하가 되었다. [[도쿠가와 이에야스]]의 키리시탄 추방령이 내려지고 주군이 [[필리핀]] [[마닐라]]로 쫓겨나자 같이 동행하였다. 카이요는 우콘 사후에 다시 [[나가사키]]로 돌아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잡혀 [[1624년]] 화형당하였다. 그는 사형당하기 며칠 전에 [[예수회]] 입회허가가 떨어져 '''조선인 최초의 예수회 수사'''가 되었고 예수회에 입회하겠다는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. 위의 사진처럼 [[일본 26위 성인]] 기념관에 다카야마 우콘의 조각상이 있듯이 카이요에 대한 비석도 다른 층에 있다. 성 근처의 마을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관을 직접 들어 영민들을 감동시켰다는 일화가 있다. 당시에 천민들이나 관을 들었기 때문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